
서대문 형무소 역사산책기 /오승호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분과위원회 1차 역사산책을 2026년 11월 29일 토요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시작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마포 공덕동(현 서부지원)에 있던 마포형무소 이전으로 부터 출발이 된다.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건물배치는 사무동 감방 간수 숙소, 노역동, 사형장, 운동시설 등으로 구성된 유럽풍 근대적 붉은 벽돌구조이다.
특히나 감방구조는 중앙에서 중앙동, 좌측동, 우측동을 부채살 처럼 배치하여 한 명의 감시자가 세 곳을 보며 통제할수있는 구조로 건축하였는데 이러한 감시구조는 야외 운동시설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역사문화위원/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미셀푸코가 감시와 권력을 언급한 발명품인 감옥의 구조와 비슷하다. 다른점은 푸코는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사육장처럼 감방을 배치하였다면 이곳은 반원형 형태로 로마 원형극장을 연상하듯 건축했다는 것만이 차이다.
마침 <죽음의 집에서의 삶>이란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죽음의 집으로 불리웠던 독방과 옥중생활을 디테일하게 재현해 놓은 기획전이기에 관심이 더하였다
<죽음의 집에서의 삶>은 옥중에서 착용했던 의복, 식사, 노역, 비좁은 생활공간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독립투사의 의복을 보면 수형번호가 쓰인 인식표가 부착되었다. 미결수는 회색의복을 기결수는 붉은 의복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감자의 식사는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1~9등급으로 나뉜 밥을 받았는데, 독립투사들은 4~5등급 이하의 적은 양만 지급 받았다. 식사를 배급할 때 사용된 배식도구인 틀밥을 만들어 용기에 틀을 넣어 식사량을 줄이는 방법을 취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양이 많아보이지만 밑바닥에 나무틀을 넣음으로써 당시 한국인 한끼 식사인 평균 500g의 반 정도인 200g 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생활공간은 대개가 사상범으로 분류되어있어 사상의 전파를 우려해 노역은 허락되지 않아서 감방 안에서 더욱 힘든 하루를 견뎌야 했다.
감방에서는 하루 대부분을 정좌로 앉아 보내야 했으며 서로간의 대화는 더더욱 불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사들은 고립된 환경 속에서도 마치 모르스 부호처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두드리는 횟수를 정하여 타벽통보방식(벽을 쳐서 소통)으로 소통하면서 독립의 끈을 이어갔다. 대표적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의 일명 통방(通方)으로 옆방과 소통한 기록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전까지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를 가두었다. 기록상으로는 400명 이상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굉장히 적은 수치라서 의문이 든다. 공식적인 사형집행 기록은 위와 같다고 하더라도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다가 사망하면, 고문에 의한 사망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숨기기위해 교묘하게 죽음직전의 독립투사를 가려내어 석방을 했다. 이렇게 석방된 독립투사는 며칠을 못가 대부분 사먕했다. 이렇게 보면 사형집행 사망자 수는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형자 수를 줄인 꼼수였다.
유관순을 비롯 안창호, 한용운, 김구, 여운홍 등 수십 만의 독립투사가 죽음의 고비를 넘고 사라져간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이후에도 고문시설과 배치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어 수많은 반독재항쟁투사와 민주투사를 감금하고 고문하다가 1987년에 의왕교도소로 이전하게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여운홍은 몽양 여운형의 친동생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후 친일행적을 했다.
일제가 굳이 이곳 무악재 현저동(峴低洞)에 형무소를 지은 의도는 독립문과 관계가 있다. 독립협회가가 세웠다는 독립문(獨立門)의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문은 중국을 사대하던 영은문과 사신 접대숙소를 헐고 만들었다. 청국에 대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프로파간다에 활용하면서 위대한 제국주의 일본을 만천하에 과시하고자 형무소를 이곳에 만든 것이다. 당대 조선인들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의 상징문으로도 사용했다.
조공과 사신의 길이며 교역의 길인 의주로의 초입에는 항상 사람이 붐비게 마련인데 무학재를 넘기 전 이곳에 형무소를 건설한 이유는 자명하다. 반항과 거역을 한 모든 조선인은 이곳에 가두리라.
찬바람이 유난히 더 부는 오늘 역사산책 마지막 코스인 사형장 건물과 담장밑 시구문엔 을씨년스런 눈물의 흔적이 가득한 것같다.
사형장을 바라보고 있던 '통곡의 미류나무'는 1980년대 어느날 번개를 맞아 죽은나무가 되었다., 미류나무는 죽은채로 사형장 옆에 전시되고 있었고 자생적으로 자란듯한 가느다란 미류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통곡의 미류나무'는 조성당시에 심은 나무는 아니지만 사형장 건물과 바라보고 있어서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 구성을 더할 수 있다.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어느 독립투사가 일기장에 기록한 마지막 문장 "벽넘어 들리는가 이것은 고통의 소리가 아니라 환희의 소리이다"를 되뇌이며 출구를 빠져 나오니 등골에는 전율이 느껴진다. 마치 아직도 갇혀있을 독립영령들이 외치는듯한 통곡 같았다.
"어찌하여 이 낡은 일기장처럼 기억이 흩어졌느냐 기억하라! 치욕의 역사를!"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 선생은 옥중일기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서대문형무소의 독방은 죽음의 집이라 불리웠다. 독방은 어느 날 어느 밤이고 문이 열리지 않는곳 책도 일도 주지 않는 곳 일하는 것도 일 없는 것도 '형벌'인 장소 였소이다"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이영국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장, 이동진 해설사, 김지애씨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오승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부천시국회의 의장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2025.11.29(토) 박이정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 시인
추운 날씨에도 참여해주신 이영국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장님, 박이정 시인/ 전국시국회의 역사문화위원님, 김지애 선생님/ 이동진 해설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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